(어른)이름 없이 빛도 없이(눅3:15~22)-2025.1.12. 주현일 후 첫째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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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https://youtu.be/wmBK2-VNuL4?si=yrQ1PVJDSLgLKbqZ
(본문 중)
이처럼 세례 요한은 참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더 위대했던 것은 자신의 위대함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를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명성과 업적을 모두 예수님께 돌렸습니다.
오늘의 복음서 15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요한을 그리스도, 즉 메시아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정도로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세례 요한은 단호히 말합니다.
16절의 말씀입니다.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랐고, 자신을 메시아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진실을 밝히지 않기도 합니다.
자신을 메시아로 추앙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도 하고, 혹은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이단의 수장들은 그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이단들 뿐일까요?
교회도 그렇고, 세상의 권력자들도 그렇습니다.
조금의 명성이라도 얻은 사람들은 자신 스스로를 예수님 자리로 가져다 놓습니다.
자신을 존경하게 만들고, 자신의 모든 말들이 진리인 양 떠들어 댑니다.
작금의 우리 나라를 보십시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계엄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위협합니다.
비리와 잘못이 드러나도 고개를 뻣뻣이 들고 응수합니다.
자신을 반대하면 정의를 훼손한 것이라고 하고, 자신들의 사람들을 이용해 자기 자리를 지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고, 중세 시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변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요?
나는 내 본분을 잘 지키고 살고 있을까…
진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이웃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있을까…
글쎄요… 저는 그렇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고자 하지만, 늘 이런 영적인 싸움에서는 지는 것 같습니다.
참 불쌍하고 곤고한 인생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저에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길 힘을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 모든 것을 이겨냈습니다.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과 관심을 예수님께 돌립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푸는 사람일 뿐이다, 메시아의 신발끈조차 풀지도 못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이 세례 요한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자신의 일에 집중했습니다.
18절에는 세례 요한이 “그 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자신의 본분, 자신의 일로 되돌아 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세례 요한이 참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든지 메시아의 자리에 앉을 수 있고, 입만 다물고 있어도 사람들의 무한한 존중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의 일에 충실했던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는 위험한 일에도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로서,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으로서 분봉왕 헤롯의 잘못을 비판한 것입니다.
발단은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의 재혼이었습니다.
재혼이라는 것이 큰 문제는 되지 않지만, 자신의 아내와 억지로 이혼하고, 동생의 아내를 뺏어와 재혼한 것이라면 큰 문제가 됩니다.
이는 율법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다 전역에 전쟁을 불러올 만큼의 큰 일이었습니다.
헤롯에게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나바테아의 공주였습니다.
나바테아는 예루살렘 남동쪽에 위치한 나라로,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지만 강한 나라였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 나라의 공주와 결혼을 했고, 또 자신의 욕정을 위해 억지로 이혼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동생의 아내를 뺏어 오기도 했습니다.
이는 윤리적으로도 율법적으로도, 또 정치적으로도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나바테아의 왕이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쳐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로마에서 이를 중재하여 전쟁은 나지 않았지만, 헤롯 개인의 치정의 문제로, 백성들이 피를 흘릴 뻔 한 것입니다.
나바테아 왕이 군대를 이끌고 오기 전, 세례 요한은 헤롯의 잘못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비판했습니다.
이에 헤롯은 세례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둡니다.
분봉왕이라고 할지라도, 왕은 왕입니다.
아무리 세례 요한이라고 할지라도, 왕을 비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였을 것입니다.
요한이 이를 몰랐을까요?
오히려 더 잘 알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메시아로 생각하기도 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비판이 도마에 오를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헤롯의 잘못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권력보다 하나님을 더 신망했기에, 자신의 안위가 아닌 자신의 본분을 지킨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세례 요한의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옥에 갇혔고, 헤롯의 생일날 목이 잘리게 되었습니다.
허망한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의 본분의 최선을 다한 결과는… 권력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대로 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의 최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만 그랬을까요?
모세도 평생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리던 솔로몬도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탄식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 제자들도, 또 바울도 순교했습니다.
신앙을 지키던 초대 교회 사람들도, 또 우리 나라의 최초 선교사들도 비슷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평생 고생하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라지는데 말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사람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 안에서는, 하나님 안에서는… 이 길이 복되다 할 수 있습니다.
이 길을 걸으며 얻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고, 크리스찬만이 바라볼 수 있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얻는 평안이 있고, 천국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도 결국 하나님을 택한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버린 대가가 천국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본분에 최선을 다한 자에게는 영생에 면류관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받을 복은 이 땅에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이 교회를 시작하면서, 또 선교지에서 돌아오면서… 저 자신만의 많은 꿈을 꾸었습니다.
계획도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 꿈대로,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 뜻이 하나님의 뜻과 다를 수도 있고, 제가 원하는 대로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성장하지 않을 수도 있고, 작은 교회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제 목회가, 또 우리 교회가 실패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이 우리의 길이라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라면… 저는 우리가 복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에게 요구된 일들이 우리에게도 요구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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