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불편한 복음(눅8:26~39)-2025. 6. 22. 성령강림일 후 둘째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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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https://youtu.be/tggBHYh8-1I?si=1xMV8CKq33_yREmK
(본문 중)
그런데 여기서부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보통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을 보면, 병든 사람이 고침 받거나 죽은 사람이 살아나면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귀신을 쫓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신이 나가고 사람이 평안을 찾으면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하지만 오늘의 복음서는 이것으로 끝을 내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갑니다.
예수께서는 귀신을 쫓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귀신에게 이름을 물으십니다.
이름을 물으시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귀신이 정체를 숨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일수도 있고, 또 귀신 하나가 아니라 많은 귀신이 그 사람에게 들렸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귀신은 자신의 이름이 “군대”라고 대답합니다.
군대라는 말은 라틴어로 “레기오”라고 하는데, 수 천의 군사로 이루어진 로마의 군대를 이르는 말입니다.
즉, 그 사람에게는 수 천의 귀신이 들어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 그 어마어마한 숫자의 귀신들은 어떠한 힘도 쓰지 못합니다.
그저 무저갱으로 보내지 말아달라는 간곡한 부탁만을 할 뿐입니다.
계시록 20장에 따르면 무저갱이라는 곳은 사탄이 최후의 심판을 받을 때까지 갇혀 있는 곳입니다.
어떤 권세도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마침 그 곳에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귀신들은 그 돼지 떼 안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께서 이를 허락하시자 수 천의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 떼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비탈을 내리 달아서 호수로 뛰어들어 죽습니다.
그것이 레기오, 군대라는 귀신들의 최후였습니다.
왜 오늘의 복음서는 귀신의 이름을 밝히고, 돼지에게 들어가 최후를 맞이하는 것까지 기록했을까요?
여기에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실제로 오늘의 복음서의 배경이 된 거라사 지방에는 로마군 제14사단의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로마군이 죽어서 귀신이 되었다는 말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된다는 이야기는 우리들의 상상이나 전설일 뿐, 성경 어디에도 그런 이야기는 적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귀신의 이름이 로마 군대를 나타내는 레기오이고, 왜 그 귀신이 다른 동물이 아닌 돼지 안으로 들어가 몰사했을까…
이를 놓고 생각해 보면, 거라사 지방은 로마군이 득세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거라사 사람들은 이 로마군에 의해 피해를 입고 고난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거라사로 가셔서 이 레기온을 멸하시고 그 사람을 구원하셨다는 말은, 거라사 사람들을 향한 위로이고 복음의 메시지였습니다.
세상의 어떤 권세도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따르면 돼지는 올림푸스 신 중에 하나였던 데메테르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데메테르는 제우스의 누나이고, 대지를 주관하는 풍요의 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데메테르가 이 땅에 풍작과 기근을 준다고 믿었으며, 로마군이 주둔하고 그리스 문명 가운데 있었던 거라사 지방 사람들도 당연히 이를 믿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풍요를 위해 올림푸스 신들에게 돼지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명으로 레기오, 즉 군대 귀신이 풍요의 신을 나타내는 돼지 안에 들어가서 몰사합니다.
이는 로마의 권세도, 로마의 신들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복음이 로마를 점령할 것이고, 그리스 문명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생각과 풍습을 바꿀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원의 이야기를 들은 거라사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편해 합니다.
36~37절의 말씀입니다.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고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큰 변화나 내적 갈등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게 합니다.
내 중심과 가치관을 바꿉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을 불편해 합니다.
교회에 대한 인상이 좋아도, 심지어 교회를 다니고 있어도 복음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 믿고 복 받고, 위급할 때 도움 받고, 내 생활이 윤택해지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복음이 자신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길로 인도하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그냥 지금까지 살던 대로 살며, 내 고정된 생활에 평안만을 주기를 원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삶의 주체가 하나님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 소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 말씀대로 사는 것.
참 은혜롭지만, 불편한 말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는 그렇게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안의 레기오를 몰아내고, 돼지 안으로 들어가게 하셔서 몰사 시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22~24절)”고 말합니다.
세상의 힘과 풍요가 아닌 복음의 새 사람을 입는 것.
그것이 우리 믿는 자가 향해 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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