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우리들의 아버지(눅15:1~3, 11~32)-2025. 3. 30. 사순절 넷째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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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https://youtu.be/iPvKe4wfxIs?si=s3ndTO-bCFgVc_q9
(본문 중)
오늘의 복음서 13절을 보면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유산을 받자마자 다른 나라로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허랑방탕하게 상속받은 유산을 씁니다.
그러니 둘째가 유산을 요구한 목적은 자신의 일이나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아버지의 돈을 폼나게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요즘 말로 플렉스가 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저는 이 둘째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아버지가 이런 둘째에 대해 몰랐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 가고,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새는 법입니다.
아버지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둘째에게 유산을 상속해 줍니다.
그리고 둘째에게만 상속하지 않습니다.
12절에는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즉 둘째에게 유산을 상속하면서 첫째에게도 상속해 주었던 것입니다.
둘째에게만 유산을 주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겠지요.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참 우유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같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일입니다.
재산을 지키는 것이 가장 답고, 집 안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야기 속 아버지는 유산을 상속해 줍니다.
아들에게 참 약한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둘째는 아버지의 재산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허랑방탕해서 재산을 낭비했고, 다 없애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흉년이 들자, 돼지를 쳤습니다.
돼지를 쳤다는 것은 그만큼 살림이 어렵게 되었다는 것 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유대교를 포함, 중동 문화권에서 돼지를 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들의 율법에 따르면, 돼지는 아주 부정한 동물입니다.
당연히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손도 대지 않습니다.
레위기 11장에 따르면 돼지는 부정한 동물로 간주되어 있고, 율법은 돼지를 먹거나 고기를 만질 경우 선택된 백성에서 떨어져 나갈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그들의 문화권에서 돼지는 먹지도, 만지지도, 기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둘째는 자신의 형편이 좋지 않게 되자, 돼지를 칩니다.
이것은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신앙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조차도 둘째를 구원해 주지 못했습니다.
둘째의 형편은 날이 갈수록 나빠져만 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최악의 상황이 계속되자, 그제서야 둘째는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먹고 사는 것마저 잘 안 되니 아버지가 떠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상속 받은 유산은 하나도 없이 빈털터리로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태도를 보십시오.
단 한마디의 야단도 없습니다.
“유산은 어쨌느냐, 몰골이 그게 뭐냐” 이런 말도 없습니다.
게다가 둘째가 아버지에게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둘째에게 뛰어갑니다.
그리고 자기를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는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과 신발을 가져다주고, 손에 반지를 끼워줍니다.
이는 아들의 권위를 다시 세워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유산을 내 놓으라고 한 아들, 그 유산을 허랑방탕하게 써 버린 아들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다시 아들로서 받아들이고 권위까지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하여 잔치를 베풉니다.
참… 속도 좋은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트러블이 하나 생깁니다.
바로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를 섬기고 그 말씀대로 따랐던 큰 아들이 불만을 터뜨린 것입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집 안의 모든 일을 묵묵히 돌본 사람입니다.
유산을 내 놓으라고 말한 적도 없고, 허랑방탕하게 산 적도 없습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신앙을 버린 적도 없습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훌륭한 아들입니다.
그런 아들이 화가 났습니다.
동생이 돌아와서 화가 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태도에 화가 난 것입니다.
만일 아버지가 동생이 돌아온 것을 무덤덤하게 받아주는 것으로만 끝났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동생이 돌아온 것을 환대하고 잔치까지 여니 화가 난 것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와 함께 말아먹은 놈이 떡하니 나타나 잔칫상까지 받아먹으니 화가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큰 아들은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잔칫상 가운데서 먹고 즐길 동생의 모습을 생각하니 도무지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집 밖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잔치하는 집으로 들어가자고 합니다.
이에 큰 아들은 아버지께 따집니다.
29~30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큰 아들의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충실히 아버지의 명을 따랐고, 열심히 집안을 살폈습니다.
울분이 터질 만합니다.
하지만 전부 맞는 말은 아닙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안 주었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더 큰 것을 주었습니다.
둘째에게 유산을 상속할 때, 아버지는 큰 아들의 마음이 상할까 해서 큰 아들에게도 유산을 상속했습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큰 아들은 둘째보다 더 중요하고 더 많은 상속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큰 아들에 비하면 둘째 아들의 상속분은 현저하게 적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큰 아들은 염소 새끼 한 마리도 못 받았다고 말합니다.
지나친 표현입니다.
더 많은 것을 받았으면서, 둘째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도 받지 못했다고 아버지께 따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 큰 아들의 어처구니없는 말에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냥 아버지가 가진 권위와 힘으로 “너 들어와”라고 해도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얘, 너도 유산 받았잖니”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큰 아들의 짜증과 불평을 다 받아줍니다.
그리고 큰 아들을 달랩니다.
31~32절의 말씀입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아버지의 모습을 보십시오.
둘째 아들에게도, 첫째 아들에게도 참 무른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우유 부단해 보이기까지도 합니다.
이 아버지는 왜 자식들에게 소리 한 번, 야단 한 번 치지 않을까요?
유산을 허랑방탕하게 써 버리고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도, 많은 것을 상속받고도 염소 새끼 한 마리 못 받았다고 하는 첫째 아들에게도 쓴 소리 한 번 내지 않습니다.
그저 두 아들을 달래고 위로할 뿐입니다.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의 감정을 이해하기 때문에, 꾸짖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탕자 이야기는 특별합니다.
단순히 잃어버렸던 것을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렸던 형제를 되찾을 때는 기뻐해야 한다”는 교훈만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
탕자 이야기는 아버지의 사랑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너무 깊고 넓어서, 우리의 눈에는 무르게도 보이고, 우유 부단해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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