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6일 삼위일체주일 어른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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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무엇을 위한 삼위일체인가
본문: 요3:1~17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그 첫번째 이유는, 신학교에서 이 삼위일체에 대해 공부했을 때, 굉장히 어려웠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 삼위일체에 대한 해답이 없기 때문이고, 마지막으로는 이 삼위일체로 인해 교회 안에서 논쟁과 내분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서에는 없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몇 몇 사람들은 성서에는 없는 말이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삼위의 하나님을 말하고 있고, 예수님은 복음서를 통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바울의 편지, 베드로의 편지, 요한의 편지 등 사도들의 편지에서도 이 삼위 하나님에 대한 말씀은 늘 등장합니다.
즉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성서에서 나타나지는 않지만, 삼위일체에 대한 말씀은 자주 쓰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 신기하지요?
마치 누구나 다 아는 사람인데, 성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것처럼 삼위의 하나님은 등장을 하는데, 삼위일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복음서에서도 이 삼위의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오늘의 복음서는 어느 정도 신앙 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알고 있는 말씀일 것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능하고 인정받는 바리새인이었고, 정치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
그것은 예수님의 놀라운 표적과 그 표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니고데모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2절에 보면 니고데모는 자신을 가르켜서 “우리가” 라고 합니다.
니고데모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무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그들의 대표로서 예수님을 찾아왔고,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표적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전합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한 확인 절차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인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인가 라는 질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질문을 듣고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대답의 의도는 여러분들도 주일학교 설교에서 들으셨을 것입니다.
표적과 기적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아무리 대단한 표적을 행할지라도, 그 표적만을 보고 판단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표적과 기적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표적과 기적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아픈 사람, 고통 받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 병든 사람, 귀신 들린 사람, 배고픈 사람, 가난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의 기도처럼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 기독교인은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와 그의 무리들에게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니까(4절)”라고 질문 합니다.
저는 예전에 니고데모의 이 질문을 읽고 참 수준이 낮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지도자로서 어떻게 저렇게 밖에 사유할 수 없는가 코웃음 쳤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없다면, 성령님의 이끄심이 없다면, 이보다 더 수준이 낮은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육에 속한 자는 영의 일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와 성령의 이끄심이 없다면,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에도 들어갈 수도 없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사람이 되길 바라신 것입니다.
육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당시의 모든 가치관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선행을 먼저 떠올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
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고, 교회 일에 열심을 내고, 전도 봉사 열심히 하는 것.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뭔가 신앙적인 일들을 열심히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이라는 것은 이러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물과 성령, 세례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 외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신앙적인 일, 선한 일, 선교와 봉사 등은 하나님의 나라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저도 선교를 십년 넘게 다녀왔으니까, 게다가 목사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니까 제 일로 구원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평생에 주일에 교회를 빠진 날을 한 손에 꼽을 수 있고, 헌금도 왠만한 사람보다 많이 냈으니 이러한 일들이 저를 하나님 나라에 데려다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일들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와 성령의 인도하심만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봉사와 헌신, 신앙적인 모든 일들은 그저 거듭남 이 후에 따라오는 것들입니다.
감사함으로 하는 것이지, 천국에 가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율법을 지키고 선행을 행하던 니고데모의 가치관을 흔들었습니다.
니고데모 뿐만이 아니겠지요.
니고데모의 동료와 요한복음을 읽고 있던 원독자들의 모든 신앙적인 가치관을 흔들었을 것입니다.
율법과 선행이 구원의 척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성령의 이끄심. 즉 예수님과 성령님이 구원의 척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14~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를 이끌어 이 십자가 앞으로 데려다 놓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어렸을 적 제가 주일학교에서 가장 먼저 부르고 외웠던 성구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 요한복음 3장 16절.”
저는 이 찬양을 유치원 다닐 때에 다 외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좋아해서 우리 교회 외부 장식할 때, 한 쪽 벽에 이 구절을 써 놓았습니다.
이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은 우리들의 영생, 이 세상의 구원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이 세상의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십니다.
즉, 삼위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연합하신 것입니다.
제가 설교의 서두에서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반갑지만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이 삼위일체라는 말로 인해 과거 교회에 논쟁과 내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조는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과 내분으로 인해 탄생한 것입니다.
니케아신조, 아다나시안신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위일체를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들로 인해 생겨난 신조들입니다.
이 일로 교회가 나뉘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쫓겨나기도 했으니,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썩 좋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삼위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영생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연합하셨는데, 우리 인간은 삼위일체라는 말로 분립하고 대립했으니… 참 아이러니 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삼위일체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의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우리들의 영생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연합하십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시고, 성령으로 이끄십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고, 우리가 따라야 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7절)”
이 놀라운 구원의 말씀이 여러분들과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여러분들을 이끌어 구원의 확신을 주시기를, 세상의 유혹과 미혹에서 지켜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본문: 요3:1~17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그 첫번째 이유는, 신학교에서 이 삼위일체에 대해 공부했을 때, 굉장히 어려웠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 삼위일체에 대한 해답이 없기 때문이고, 마지막으로는 이 삼위일체로 인해 교회 안에서 논쟁과 내분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서에는 없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몇 몇 사람들은 성서에는 없는 말이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삼위의 하나님을 말하고 있고, 예수님은 복음서를 통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바울의 편지, 베드로의 편지, 요한의 편지 등 사도들의 편지에서도 이 삼위 하나님에 대한 말씀은 늘 등장합니다.
즉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성서에서 나타나지는 않지만, 삼위일체에 대한 말씀은 자주 쓰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 신기하지요?
마치 누구나 다 아는 사람인데, 성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것처럼 삼위의 하나님은 등장을 하는데, 삼위일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복음서에서도 이 삼위의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오늘의 복음서는 어느 정도 신앙 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알고 있는 말씀일 것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능하고 인정받는 바리새인이었고, 정치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
그것은 예수님의 놀라운 표적과 그 표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니고데모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2절에 보면 니고데모는 자신을 가르켜서 “우리가” 라고 합니다.
니고데모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무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그들의 대표로서 예수님을 찾아왔고,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표적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전합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한 확인 절차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인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인가 라는 질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질문을 듣고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대답의 의도는 여러분들도 주일학교 설교에서 들으셨을 것입니다.
표적과 기적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아무리 대단한 표적을 행할지라도, 그 표적만을 보고 판단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표적과 기적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표적과 기적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아픈 사람, 고통 받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 병든 사람, 귀신 들린 사람, 배고픈 사람, 가난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의 기도처럼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 기독교인은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와 그의 무리들에게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니까(4절)”라고 질문 합니다.
저는 예전에 니고데모의 이 질문을 읽고 참 수준이 낮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지도자로서 어떻게 저렇게 밖에 사유할 수 없는가 코웃음 쳤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없다면, 성령님의 이끄심이 없다면, 이보다 더 수준이 낮은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육에 속한 자는 영의 일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와 성령의 이끄심이 없다면,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에도 들어갈 수도 없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사람이 되길 바라신 것입니다.
육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당시의 모든 가치관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선행을 먼저 떠올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
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고, 교회 일에 열심을 내고, 전도 봉사 열심히 하는 것.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뭔가 신앙적인 일들을 열심히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이라는 것은 이러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물과 성령, 세례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 외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신앙적인 일, 선한 일, 선교와 봉사 등은 하나님의 나라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저도 선교를 십년 넘게 다녀왔으니까, 게다가 목사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니까 제 일로 구원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평생에 주일에 교회를 빠진 날을 한 손에 꼽을 수 있고, 헌금도 왠만한 사람보다 많이 냈으니 이러한 일들이 저를 하나님 나라에 데려다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일들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와 성령의 인도하심만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봉사와 헌신, 신앙적인 모든 일들은 그저 거듭남 이 후에 따라오는 것들입니다.
감사함으로 하는 것이지, 천국에 가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율법을 지키고 선행을 행하던 니고데모의 가치관을 흔들었습니다.
니고데모 뿐만이 아니겠지요.
니고데모의 동료와 요한복음을 읽고 있던 원독자들의 모든 신앙적인 가치관을 흔들었을 것입니다.
율법과 선행이 구원의 척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성령의 이끄심. 즉 예수님과 성령님이 구원의 척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14~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를 이끌어 이 십자가 앞으로 데려다 놓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어렸을 적 제가 주일학교에서 가장 먼저 부르고 외웠던 성구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 요한복음 3장 16절.”
저는 이 찬양을 유치원 다닐 때에 다 외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좋아해서 우리 교회 외부 장식할 때, 한 쪽 벽에 이 구절을 써 놓았습니다.
이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은 우리들의 영생, 이 세상의 구원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이 세상의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십니다.
즉, 삼위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연합하신 것입니다.
제가 설교의 서두에서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반갑지만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이 삼위일체라는 말로 인해 과거 교회에 논쟁과 내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조는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과 내분으로 인해 탄생한 것입니다.
니케아신조, 아다나시안신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위일체를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들로 인해 생겨난 신조들입니다.
이 일로 교회가 나뉘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쫓겨나기도 했으니,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썩 좋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삼위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영생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연합하셨는데, 우리 인간은 삼위일체라는 말로 분립하고 대립했으니… 참 아이러니 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삼위일체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의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우리들의 영생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연합하십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시고, 성령으로 이끄십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고, 우리가 따라야 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7절)”
이 놀라운 구원의 말씀이 여러분들과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여러분들을 이끌어 구원의 확신을 주시기를, 세상의 유혹과 미혹에서 지켜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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