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소년 예수, 신성의 발현(눅2:40~52)-2025.1.5.성탄 후 둘째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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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https://youtu.be/qegpgcpUTH8?si=CWUrucpQIcDt6d1Y
(본문 중)
오늘의 복음서는 유월절의 이야기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매 해 유월절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갔으니, 예수님도 함께 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열 두 살 되던 해에도 유월절이 되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합니다.
요세푸스라는 역사학자의 기록에 따르면, 한 조사관이 네로 황제에게 보고하기 위해, 대제사장에게 유월절에 양을 몇 마리나 잡는 지 묻습니다.
이 물음에 대제사장은 256,500마리라고 답을 합니다.
학자들은 이를 가지고 계산하여, 유월절에는 2백만명이 넘는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또한 요세푸스는 성전을 방문한 사람들이 2,700,000명이라고 기록해 놓았기도 합니다.
물론 이 숫자가 참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습니다.
과거 역사학자들의 특성상 과장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월절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요셉과 마리아도 일행을 꾸려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고, 또 돌아갈 때에 예수님의 동행 여부를 확인하지 못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위해 “수노디아(συνοδια)”라는 여행단을 꾸렸습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44절에 “동행”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수노디아”를 꾸린 이유는 예루살렘까지의 여정이 길었고, 또 강도나 도둑들로부터의 수탈을 방지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후에 “수노디아”는 초대 교회 안에서 “친교, 교제, 파트너쉽”이라는 개념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공동체성이 더 강화되고, 그 안에서 서로의 신앙과 생활을 돌보는 일이 활성화 됩니다.
“수노디아”, 이 “친교와 교제”는 우리 교회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신앙의 여정은 혼자만의 여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혼자 예수의 길을 가면서 강도와 도둑과 같은 악마의 유혹에 대항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아닌 우리, 혼자가 아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유혹에 대항하고, 실족하는 일이 없게 서로 위로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도신조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 안에 성도의 교제가 있는 것입니다.
나 혼자가 아닌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것.
이것이 우리 크리스찬들이 고백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가족, 요셉과 마리아도 “나사렛 수노디아” 안에 들어가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모든 유월절의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 때 예수께서는 돌아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무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당연히 예수께서 수노디아 안에 있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지인들 안에서 예수님을 찾았지만,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지요.
그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성전 안에서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성전 안에 계신 예수님은 선생들 사이에 계셨습니다.
여기서 선생들이란 율법학자들이나 랍비들을 말합니다.
그 안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십니다.
율법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토론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들은 12살인 예수님의 대답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겨우 12살인데, 예수님께서 가진 지식과 지혜가 놀라울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에서는 일반적으로 성인이 시작되는 시점을 13번째 생일로 봤습니다.
13살 이상이 되어야 자기 일에 책임도 질 줄 알고, 온 종일 금식도 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12살이었습니다.
성인으로 취급 받지도 못할 나이인데, 선생들과 토론을 하고, 선생들은 예수님의 대답에 놀라워했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가지고 있었던 비범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당시 중동 지역의 걸출한 인물들은 성인이 되기 전에 비범함을 보였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페르시아, 지금의 이란을 세운 고레스도 12살에 비범함을 보여 왕궁으로 불림을 받았고, 다니엘도 12세 정도의 소년이었을 때 비상한 인물로 책정되어 바벨론 왕궁으로 들어갔습니다.
모세도, 사무엘도, 마케도니아 제국을 세운 알렉산더 대왕도 소년 시절에 비범함을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12살 때의 기록은, 그들처럼 비범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예수님도 위대한 인물들처럼 소년 시절에 비범했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누가복음의 저자는 오늘의 복음서를 기록한 것일까요?
글쎄요… 저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소년 시절이 비범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니, 비범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소년 시절이 기록된 이유가 단지 소년 예수의 비범함을 나타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복음서 48절에서 마리아는 소년 예수님을 책망합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이런 책망은 당연한 것이지요.
예수께서 나사렛으로 함께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죄송하다, 잘못했다”가 아닌 전혀 다른 대답을 하십니다.
49절의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언뜻 읽으면 예수님의 이 대답은, 부모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당연히 하나님의 집에 있어야 하는데, 왜 그것을 모르셨냐?”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대답은 잘못을 지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자신이 누군지를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먼저 알려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인이 되기 전 예수님에게 나타난 자기 인식, 자각의 순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지만, 육신을 입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장의 과정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순간이 오늘의 복음서의 내용, 예수님의 12살 때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년 예수 안에 감추어 있던 신성이 발현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나사렛의 집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 내 진짜 아버지 집입니다”라는 것을 자신을 돌보아 주었던 요셉과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복음서의 주된 내용은 요셉과 마리아의 잘못을 지적한 것도, 소년 예수의 비범함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자각하셨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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