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설교)믿음, 교회를 세우는 축(막9:14~29), 2024.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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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https://youtu.be/ghgz96UBqWA?si=yJVLBM7_wjoWKpPh
2024년 9월 15일 성령강림일 후 열일곱째주일 어른 설교
제목: 믿음, 교회를 세우는 축
본문: 막9:14~29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언제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것이 필요할까요?
저는 목회자이지만, 한 때 믿음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 신앙인 가운데서 마구잡이로 남용되고 오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남용과 오용 가운데서 우리들에게 잘못된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다”와 같은 말씀이 성서 본문의 맥락과 상관없이 사용되었고, 이로 인해 우리는 오용된 믿음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과거 교회 역사를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 우리의 욕심과 합쳐질 때는 반드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면죄부도 인간의 욕심의 결과였고, 마녀 사냥이나 십자군 전쟁도 욕심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교회도 마찬가지였지요?
기복 신앙!! 이 기복 신앙이 믿음과 욕심이 합쳐진 대표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축복 성회나 수능 기도회, 일천번제 헌금과 같은 것들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말씀과는 상관없이, 기도하고 복을 구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우리의 믿음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부지불식간에 우리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뜻보다는 우리의 뜻을 주장하게 합니다.
우리의 원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해 실망하고 좌절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욕심과는 정반대의 길임에도 말입니다.
믿음을 내세워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것.
이것이 기복적인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라는 것은 위험한 것일까요?
언제든 우리의 욕심에 먹혀버릴 수 있는 연약한 것일까요?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믿음에 대해 여러 좋지 않은 일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믿음은 우리를 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찾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을 이어주고 깊은 관계를 맺게 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자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우리의 욕심에 사로잡혔을 때에는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안위만을 구하게 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해 버립니다.
믿음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선하게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오용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개인의 안위만을 위한 힘 없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의 복음서에도 이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서의 첫 장면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서기관들이 변론, 즉 논쟁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구경합니다.
제자들과 서기관이 논쟁하는 이유.
그것은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뭐라고 논쟁했을까요?
성서에 쓰여 있지 않지만 상상을 한 번 해 봅시다.
서기관들은 제자들이 능력이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또는 니네 선생도 능력이 없으니 제자들도 능력이 없는 것이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니네 선생은 자기는 능력을 행하지만, 제자들에게는 그 능력을 주지 않았다고 비난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제자들은 어떻게 변론했을까요?
자신들의 선생은 능력이 있지만 자신들은 능력이 부족하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서기관 니네들도 못하지 않느냐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할 수 없는 것을 왜 우리에게 시키고 비난하냐고 항의했을 수도 있습니다.
상상만으로도 참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예수님이 등장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모든 상황을 말합니다.
그런데 말하는 것이 좀 트집잡는 것 같기도 하고 비아냥 거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18절입니다.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니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지난 주 우리가 함께 말씀을 나누었던 수로보니게 사람, 이방 여인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예수님께 간절히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제자들이 저 정도 밖에 안 됩니다”라는 식의 모습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 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19절)”
그들은 유대인, 즉 스스로를 하나님께 선택 받은 백성이라 여기며 그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아무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능력이 없으면 겸손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낮게 엎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책임을 서로에게 돌리고 있었습니다.
서로를 힐난하고 비난했습니다.
상대방의 능력 없음을 꼬집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을 고치고자 했던 사람도 제자들의 능력 없음을 비아냥거렸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믿음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도 믿지 못하니, 그저 서로 변론하기 바빴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능력 없고 변론만 하는 사람들을 향해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는 세대.
예수님의 제자이면서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세대.
누구 하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믿음의 능력을 보이지 못한 세대.
예수님께서는 무능력하고, 책임을 전가하기에 바쁜 그들에게 “얼마나 너희를 참아야 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귀신들린 아이를 부르십니다.
20절 이하의 말씀에는 아이의 증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보니 귀신 들렸다기 보다는 간질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지금과 같이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였고, 아이가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였기에 귀신 들렸다고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귀신 들린 것이든 간질이든 판단하는 것이 아니지요.
둘 다 고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예수님 앞에 이 아이를 데리고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라고 대답하고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22절)”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체념과 같은 아버지의 대답에서 저는 그 동안의 아버지의 고생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분명 아버지는 아들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일을 했을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데리고도 갔을 것이고, 유능한 랍비나 서기관들에게도 갔을 것입니다.
혹은 의사나 무당에게로 갔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접신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무당을 찾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아이를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믿음이 없는 세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고 체념하듯이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를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이 못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없음”이 못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23절)”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믿음,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 믿음이 아버지에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24절)”라고 외칩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아이를 감싸고 있는 귀신을 향해 꾸짖으십니다.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25절)”
이 말씀에 귀신은 아이에게서 떠납니다.
아이가 다시 한 번 심하게 경련을 하고 죽은 것 같이 되었지만, 예수께서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일으키십니다.
아이가 새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아버지의 믿음이 아이를 구한 것입니다.
더 이상 믿음이 없는 세대가 아닌 믿음이 있는 세대가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대는 교회의 부흥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교회를 옹호하는 사람들과 비난하는 사람들이 서로 변론하고 있는 세대입니다.
뉴스에서는 교회의 비리와 싸움이 연신 흘러나오고, 교회는 철옹성처럼 자신들을 닫고, 자신들의 일을 숨기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단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의견의 대립, 정치적인 문제로 뉴스의 한 면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도 목사이지만,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목사나 장로라고 소개하면 덜컥 경계부터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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