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모든 이의 하나님(마15:21~28)-2026.8.16.성령강림일 후 열두째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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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https://youtu.be/gi4rG_S1-UE?si=x5zhIBPR3zDfFydd
(본문 중)
두로와 시돈 땅에서 예수님은 한 가나안 여인을 만납니다.
통상적으로 두로와 시돈 땅이 구약 시대에서는 가나안이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도 그 지역 사람들을 가나안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 주변으로 와서 소리를 지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이 여인이 어떻게 예수님을 찾아왔는지 쓰여져 있지 않지만, 같은 사건이 기록된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이 났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소문을 들은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이 묵는 집으로 와서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합니다.
딸이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별 답이 없으십니다.
입을 꾹 다물고 단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에 그 여인은 더 큰 소리로 간청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지난 주에도 말씀 드렸다시피, 우리 예배의 시작에서 우리도 외치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 가운데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치는 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배를 심심치 않게 하기 위해서 하는 말도 아니고, 예배를 구성지게 짜기 위해서 하는 말도 아닙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를 구하시고 도우실 수 있다는 외침입니다.
나의 어려운 상황에서, 우울하고 갑갑하고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이런 고난 속에서, 주님만이 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의 시작 부분에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칩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어렵게 어렵게 짊어지고 왔던 모든 짐들을 주님 앞에 내려 놓고 쉬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내 짐이 너무 무겁고 감당하기 어려우니, “주님 나 좀 불쌍히 여겨 달라”고 우리는 예배를 통해 주님께 외칩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모두 쉬게 하실 것입니다.
그 짐을 내려 놓게 하시고, 하늘의 평안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키리에 엘레이손”을 부르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오늘의 복음서의 가나안 여인도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런 외침에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참 이상합니다.
언제나 사람들의 외침에 즉각 응답하시는 예수님이셨는데…
이번에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그를 보내라”는 말이 얼른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줘서 보내라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쫓아 버리라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문맥상 너무 시끄럽고 방해되니 얼른 그 여인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는 것 같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막막한 마음에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제자들은 그 막막한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 말씀을 그 여자가 들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자들은 확실히 이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를 들은 제자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당연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평소와는 다르다고 생각했을까요?
그것도 아니면 이제 우리 예수님이 제자리를 찾아오신다고 생각했을까요?
우리야 이 가나안 여인처럼 이방인이고, 이방인에 대한 접촉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니 제자들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제자들의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쨌든 그 동안의 예수님의 행보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점점 점입가경이 되어 갑니다.
여자가 예수님 앞으로 와서 절하며 다시 한번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더 모진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앞서의 예수님의 답은 가나안 여인이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예수님의 답은 가나안 여인도 확실히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완강했습니다.
자녀의 것을 빼앗아 개들, 즉 이방인들에게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에 비유했습니다.
더러운 곳에도 쉽게 들어가고, 정결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레위기 11장에 따르면 개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순수 혈통을 주장했던 유대인들은 혼혈 민족인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처럼 여겼습니다.
주인이 없는 유기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도 그와 똑같이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가나안 여인을 도우는 것이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이방인들을 향한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이방인들과의 접촉을 부정하게 생각해 떡 먹을 때에 손을 씻는 것처럼…
또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인 것처럼 말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그렇게 이방인들을 낮춰보고, 그들을 편견으로 대하는 유대인들의 심리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제자를 포함한 모든 유대인들이 원하고 있던 가름을 말씀하십니다.
자신들과 이방인을 가르고, 하나님이 자신들만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는 그런 가름을…
예수님은 자신의 대답에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이방인도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 믿음이 유대인들보다 충분히 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가나안 여인에게는 진짜로 자신을 신뢰하고 있는지, 구원이 이스라엘에서 나는 것을 믿는지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여인은 이 시험을 보기 좋게 통과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자신들만이 옳고, 자신들만이 선택되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
그래서 전통을 내세우며 이방인들을 개처럼 여기는 그들 앞에서, 이방 땅의 여인은 놀라운 믿음을 보여줍니다.
어느 유대인들도 할 수 없는 대답을 하며, 그들의 편견을 박살 냅니다.
그리고 이 믿음에 예수께서는 즉시 응답하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이런 예수님의 응답은 그저 이방 여인을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에서만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의 믿음을 인정하고, 그 믿음이 유대인들보다 크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지난 주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바다에 빠진 베드로를 보며 “믿음이 작은 자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네 믿음이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고, 자신의 혈통을 내세워 이방인들을 낮게 여기는 제자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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