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갈 길을 가는 사람들(눅13:31~35)-2025.3.16. 사순절 둘째 주일 설교
작성자 정보
- 담임목사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2,155 조회
- 목록
본문
설교영상 https://youtu.be/d1G2sAqq_q0?si=FOhJC6O3qkhCpEIp
(본문 중)
이처럼 오늘 복음서에서 나오는 예루살렘도 이름의 뜻이 있습니다.
예루(이르)는 도시라는 뜻이고 살렘(샬렘)은 평화라는 뜻입니다.
평화의 도시. 이것이 예루살렘의 이름의 뜻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유대교에서도, 이슬람에서도, 우리 기독교에서도 성지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었기 때문에 성지가 되었습니다.
이슬람에서는 이슬람의 최고의 예언자 마호메트가 예루살렘에서 하늘로 승천해 알라를 만났고, 알라에게 계시를 받고 왔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성지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에서는… 왜 성지가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에서도 예루살렘은 성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은 여러 종교에서 성지로 불려지는 곳이고, 그 이름의 뜻은 평화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와 성지의 고장인 예루살렘의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수 천년 동안 많은 전쟁이 있었고, 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역대하 24장에는 성령에 감동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제사장을 예루살렘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인 이야기가 쓰여져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헤롯에게 잡혔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지요.
성경 외의 역사적으로도 예루살렘을 둘러 싼 유대와 로마의 전쟁, 중세에 있었던 약 200년간의 십자군 전쟁, 근대에 들어서 일어난 3차 중동 전쟁, 제작년에 일어났던 하마스 전쟁도 발단은 예루살렘에서의 분쟁이 근원이었습니다.
성지 또는 평화의 도시라고 불리는 예루살렘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평화라는 이름, 거룩함이라는 이름만을 가진 도시, 그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오늘의 복음서에서 바로 이 예루살렘이 언급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었고,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종착지가 될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었고, 예수님도 자신의 메시아로서의 사명이 예루살렘에서 끝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잘못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실 것입니다.
선지자들을 죽인 예루살렘, 이름만 평화의 도시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참 평화가 시작되는 예루살렘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셨습니다.
참 평화를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시는 도중 갈릴리의 여러 마을에 들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새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깨달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갈릴리 지역은 헤롯 안디바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헤롯 안디바는 분봉왕으로 갈릴리와 페레아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뒤에 지도를 보시면 예루살렘이 있는 유다 위에는 사마리아가, 사마리아 위에는 갈릴리가 있다는 것이 보이실 겁니다.
그리고 페레아는 사해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와 페레아를 다스렸고, 유다와 사마리아와 이두매는 헤롯 안디바의 형, 헤롯 아켈라오가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형 헤롯 아켈라오는 분봉왕이 된 지 약 10년만에 폐위됩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폭정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과 갈등이 컸고, 수많은 반란으로 인해 결국 갈리아로 유배 됩니다.
그리고 유다와 사마리아와 이두매는 로마의 직할령이 되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아닌 총독이 다스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왕이 아닌 빌라도라는 총독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여하튼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셨고, 이 소문은 곧 헤롯 안디바의 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선지자다, 엘리야다 라고 칭하며 따랐습니다.
헤롯에게 있어서 이런 백성들의 소요도 달가울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헤롯의 신경을 계속 건드는 것은 일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환생한 세례 요한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누가복음 9장에는 헤롯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당황해 하는 모습이 쓰여져 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죽인 세례 요한이 환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헤롯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활동과 세력이 커지자 곧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오늘의 복음서 31절의 말씀입니다.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바리새인들의 이 말은 헤롯이 예수님의 활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말을 듣고 떠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가야 할 길, 예수님의 할 일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일.
그 일이 남아 있었기에 예수님은 헤롯의 위협에도 자리를 뜨지 않으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이 모습은 반드시 기억되고 지켜져야 합니다.
우리 역시도 신앙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때로는 도망치고 싶고, 신앙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유혹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너무나도 괴롭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해도 삶의 변화가 없고,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만 갑니다.
그래서 헌신을 해도 기쁘지 않습니다.
내 노력이, 내 신앙이 무의미한 것은 아닌지…
그 동안의 고생이 허사인 것처럼, 마치 뜬구름 잡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저도 여러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에 와서 이 교회를 시작한지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지만, 눈에 보이는 변화는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온갖 어려움들이 생겨납니다.
사방 팔방으로 뛰어다니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만나고, 교회 오라고 구걸하다시피 부탁을 하고, 밤을 세워 설교를 준비하고 있지만…
얻어지는 것, 보여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벌써 수 십년을 목회 했는데, 아직도 하는 것마다 실수 투성이 입니다.
지난 주에는 새벽에 기도하는데, 그만 입이 턱 막혀 한 마디도 기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참을 기도 노트만 바라보다가 다시 사택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어려움이 언제 끝날까?
우리는 언제 이 개척의 어려움이 끝나게 될까?
과연 우리 교회 성도들과 함께 기뻐할 날이 올까?
우리 아이들은 이런 아빠의 모습을 존중해 줄까?
여러 고민과 번민들이 저를 사로 잡았고, 모든 상황이 두려워 졌습니다.
그러다가 설교를 위해 오늘의 복음서를 읽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떠셨을까?
예수님은 나와 다르셨을까?
글쎄요… 저는 예수님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에게는 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실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실수는 예수님의 흠이 되었고, 율법학자, 사두개인들까지 예수님의 흠을 잡기 위해 몰려와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헤롯까지 예수님을 노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뿐 아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였고, 새 시대를 열기 위한 것이었지만…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예수님을 얼마든지 실족하게 만들고, 도망치게 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갈 길을 가십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고, 메시아가 가야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갖 위협과 도발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셨습니다.
예수님 전에 이 땅에서 활동했던 수많은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돌을 맞아 죽음을 당한 제사장처럼, 그리고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관련자료
-
링크
-
이전
-
다음





